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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bba Day _ 경기도 포천, 연천

By Jimbba Jayz


마냥 쉬울 리 없는 양조장 섭외, 그리고 기행의 시작



“서울 신당에서 한국술을 판매하는 짐빠라는 곳인데요. 귀사의 양조장을 방문하고 싶은데 O월 O일 토요일에 방문 가능할까요?” “죄송해요. 그날은 출근 안 해요”

경기도 연천만을 가려고 했던 우리의 계획은 연거푸 거절로 인해 양조장 기행을 포천까지 넓히게 했다.

포천·연천 양조장 기행은 섭외 단계부터 힘겨웠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두 번째 짐빠데이의 아침. 드르륵.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K 카톡이었다. ‘형님들, 새벽에 세 차례 토했는데 여전히 상태가 좋지 못해요’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전날 K는 매장 근무를 마치고 비즈니스상 중요한 분과 급 만남을 가졌고 과음을 했다. 컨디션 회복을 위해 푹 쉬어야 하는 K를 남겨두고 O의 집으로 향했다.

O는 대표적인 잠꾸러기다. 업무 때문에 새벽마다 잠드는 탓일까. ‘얘들아 O가 안 일어난다...’ ‘안 되면 둘이 다녀오자’ D가 쿨하게 말했다. 이내 체념하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자마자 O에게서 희소식이 날라왔다. 그가 일어났다. 30분 후 그는 후다닥 준비하고 내려왔다.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D를 태워 본격적으로 포천으로 떠났다.


4대째 내려오는 내촌주조

D의 집에서부터 한 시간쯤 달렸을까. 내촌주조의 모습이 보였다.

큰 대로변에 놓인 벽돌 건물. 이 아니라 그 옆에 조그마한 초록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장님이 따듯한 커피 한 잔을 주시며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본인은 사장이 아닌 이사라고 소개한 분. 알고 보니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내촌주조를 이끌어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문을 열고 들어간 컨테이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액자에 보관된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 내용을 읽지 않아도 세월을 가늠하게 한 종이엔 ‘단기4293년’이라고 적혀 있다. 1960년에 발급한 주류제조면허다. 주류업이 예나 지금이나 정부로부터 엄격히 관리돼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촌주조는 경기도 포천 내촌삼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여섯 명의 구성원이 80년 전통을 잇고 있다. 창업자(現 이사님의 할아버지)가 인근 양조사의 직원으로 일하다 옛 내촌초등학교 터에 자리를 잡고 설립했다. 양조장의 한 가운데엔 이를 기억하는 비석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내촌주조는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 일품인 ‘내촌生쌀막걸리’와 ‘내촌生찹쌀막걸리’를 주력으로 제조한다. 포천에서 유명한 일동·이동막걸리 말고도 지역, 특히 내촌 주민들에게 만큼은 큰 사랑을 받는 막걸리다.

이사님이 직접 창고에서 두 막걸리 병과 하나의 약주 병을 가져오셨다. 본래 막걸리만 판매하던 내촌주조는 2대 사장님이 심혈을 기울여 약주를 개발했다. 이 약주의 이름은 ‘18노미’. 다함께 청주의 이름을 읽어보고 있노라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십팔노미......’ 개인적으로 잊혀지지 않은 청주명이기에 최고의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18노미에서 18은 쌀을 숙성할 때 나오는 자연발생 알코올의 농도, 노미는 露(이슬 로) 米 (쌀 미)를 결합한 뜻이다. 쌀로 만들어낸 18도의 이슬. 설명을 듣고보니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18노미는 일년에 단 두 번(명절용)으로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다.


지역에서만 소화

대부분의 물량을 인근 지역에서 소화한다. 생산설비를 늘려 서울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싶지만, 여건이 쉽지 않다는 게 이사님의 설명이다. 지방의 소규모 양조장의 고충이 느껴졌다. 짐빠의 소명 (전국 곳곳에 숨겨져 있는 양조장과 소비자를 연결한다)이 다시 한번 떠올라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니스

컨테이너를 나와 몸을 돌려보면 바로 옆에 테니스장을 볼 수 있다. 2대 사장님께서 젊었을 때 이곳에서 왕왕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 신기한 사실은 이사님이 가업을 승계하기 전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대학까지는 테니스 선수로 살아오다 전역하고 28살부터 본격적인 양조가의 인생을 살고 있다. 테니스를 그만두고 술을 빚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없냐 물음에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나요. 다 운명이 있는 거죠”라는 대답에 담담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술과 사람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시계를 보니 1시간 30분이 지났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아침 탓인지 배에는 꼬르륵 소리가 연신 났다. 서둘러 술들을 사고 인근 갈비탕집으로 향했다.



내촌면 주민들의 기억 속에 스며든 내촌주조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솜씨 좋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갈비탕집.

새벽에 갓 출고된 찹쌀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 갈비탕집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오케이. 역시 시골인심 무엇 크으으으으. 막걸리를 가지러 차에 가는 길에 사장님이 한 마디 던지셨다. “여기 내촌막걸리가 유명해.” 이어 사장님께서는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유년 시절 국민학교 근처에 내촌양조장이 있었고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쪄놓은 고두밥이 마당에 깔려 있곤 했단다. 그 시절 어린 아이들은 쌀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사장님을 비롯 많은 아이들이 오며가며 바닥에 펼쳐진 고두밥을 집어먹었다고 웃으며 얘기하셨다. 지금이야 쉽게 보기 힘들 뿐더러 하면 안 되는 행동이지만, 그 시절 서리라고 부르며 용인되던 정의 온기가 궁금했다.



막걸리의 재해석


갈비탕 한 그릇에 내촌生찹쌀막걸리를 걸치고 구디가든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러 갔냐고? 노노노 그렇다면 짐빠가 아니지. 그곳에 막걸리 라테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다. 막걸리를 끓여 알코올을 날리고 커피 위에 얹은 혁명적인 레시피! 여기서 사용되는 막걸리가 바로 내촌막걸리라고 한다. 막걸리라테를 맛본 소감은 다음과 같다. 막걸리인가 크림인가? 예상보다 막걸리 맛이 안 느껴졌다. 그냥 크림 같다. 아인슈페너와 매우 유사한 맛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후다닥 막걸리라테를 마시고 포천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했다. 곧 서둘러 연천으로 향했다.



연천으로 향하는 길

연천 땅을 밟아보긴 또 처음이었다. 포천 바로 옆 동네로만 예상했는데 웬걸. 1시간은 족히 달려갔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일동 이동 막걸리를 산 거는 안 비밀). 양조장과 이어진 연천 도로는 호젓했다. 곳곳엔 군용 트럭이 주차돼 있었고 좀처럼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한참을 달려가던 중 창밖을 구경하던 S가 말했다. “어! 여기가 왜 유네스코에 지정됐지?”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절벽진 산들이 보였다. 마치 제주도에서 보던 절리를 닮았다. 연천,,, 흥미로운데??


연천에서 인생 2막

어느새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동색 지붕이 눈에 들었다. 본능적으로 저곳이 술이 익어가는 곳이라 짐작했다.


연촌양조의 문을 열자 전시된 각종 술들이 우리를 반겼다. 이곳은 얼마나 재밌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자리에 앉아 인사를 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멋들어지게 긴 수염의 사내. 이내 새어나오는 구수한 어투. 대표님은 본래 전라도 진도 태생으로 해남을 거쳐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고향과 수백km 떨어진 연천에 터를 잡게 됐을까?

IT보안 개발자로 평생을 일해온 대표님은 안식년에 다녀온 유럽여행 이후 삶이 바뀌었다. 귀국해 마신 첫 희석식 소주의 맛이 안 느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전통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5년 퇴직 무렵 막걸리학교에 입학해 양조를 배웠다. 술을 빚는 것이 꽤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양조를 배울수록 전통주의 매력에 빠졌고, 이를 연구하고 제조하는 터전을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양조시설을 구비하기 위해선 비싼 서울땅은 적합하지 않았다. 적당한 곳을 찾다 보니 연천까지 와버렸다. 연천에서 군생활을 했지만, 제대 후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물과 물이 만나는 곳, 연천

경기도 연천은 북한 인접지역으로서 군사지역인 만큼 산업시설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았다. 연천은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역인데, 연천양조는 1급수인 임진강 상수와 지하수를 사용한다. 이 물로 술을 빚으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연구자의 삶

양조장 한켠에 연구실을 방불케하는 공간이 있다. 현미경, 계량기, 스포이드 등 과학자의 실험실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대표님은 2017년 연천에 도가를 열고 전통주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 개발한 율무막걸리는 실패였다. 율무는 껍질이 단단한데, 이것 때문에 발생하는 발효과정 특성을 못한 탓이었다. 각종 문헌과 사료를 독파한 끝에 2019년이 돼서야 지금의 연천율무막걸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IT보안 개발자 출신으로서 어떤 사안을 연구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다는 대표님.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에 맛있는 막걸리를 탄생시킨 비결이다. 연천양조는 6년간 36가지의 술을 개발했다. 현재는 15가지의 술을 판매하고 있다.

연천양조는 IT기술을 접목한 ‘스마트전통주관리시스템’을 준비 중이다. 술을 숙성하는 단계에서 온도와 산도를 관리해 술맛을 일정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본래 전통주는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는데, 항아리 부위마다 온도 및 산도가 달라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스마트전통주관리시스템’은 통의 다섯 군데를 나눠 온도와 산도를 측정해 일정한 맛을 내는 술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담금주 = 버팀목

대표님과 한창 재밌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 크고 둥근 투명 플라스틱 통이 눈에 들어왔다. 통에는 ‘율무로 증류한 담근술’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표님, 저 담금주는 뭐예요?” “하하 저거요? 연천양조의 버팀목입니다.” 역사가 짧은 양조장인 만큼 단골이 많지 않은데, 담금주는 특정시기에 꾸준한 매출을 내는 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실 수확철, 포도 수확철 등 제철 원료를 활용한 담금주가 필요할 때, 이 술을 찾는다고 한다. 이 담금주는 특이점이 없는 게 특징이다. 담금주는 담글 원료를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게 연천양조의 철학이다.

연천양조 술빚기의 차별점은 밑술을 만들 때 고두밥이 아닌 죽을 쒀 숙성시킨다는 점이다. 이 단계에서 율무를 첨가한다.


아연우향

아(我)주: 나를 위한 술. 일반 탁주보다 쌀 함유량이 40배가 넘는다고 한다.

연(戀)주: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위한 술. 약주. 연인과 데이트할 때 마시는 술.

우(友)주: 벗을 위한 술. 소주. 친구들과 취하고 싶을 때 마시는 술.

향(饗)주: 제례주. 종묘제례주를 복원했다. 연천은 고려 왕실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연천양조가 종료제례주를 복원하고, 이 제사에 연천양조에서 복원한 제례주를 쓴다.

술에 진심

두 시간 가량의 대화를 마치고 주섬주섬 술을 챙겨 일어났다. 그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진이 붙어있는 병.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 사진은 누군가의 웨딩 사진이었다. 대표님이 말했다. “내 딸아이의 결혼사진이에요. 내 딸의 결혼식에 내가 만든 술을 올리고 싶었어요.” 그의 인생 2막은 술로 점철된다.

술에 진심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리도 이만큼 술에 진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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